어른들은 왜 낙서를 하지 않을까?
어릴 때 그림을 그리는 나에게 엄마가 말했다.
화가는 취미로 하라고.
그 말에는 그림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그 아이가 혹여나 그림 그리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고 재미있어할까봐, 그래서 돈도 벌지 못하는 화가될까봐 우려하는 마음이 담겨있었다.
엄마는 항상 (엄마가 되고 싶었던) 아나운서 같은 직업을 갖고 그림 그리는 것은 취미로 해도 된다고 말했었다.
유치원정도 다닐 만큼 어렸던 나였지만, 어른들이 장래희망을 물어볼 때 ‘화가’라고 대답하는게 부적절했다는 걸 알았다.
아마 어른들이 원하는 답변은 ‘선생님’ 정도의 무난하게 덕담을 해주고 지나갈 수 있는 직업이었을 것이다.
당시 내가 아는 그림을 그리는 직업의 이름이 ‘화가’ 밖에 없어서 화가라고 대답한 것이었는데, 화가는 마치 철학자처럼 ‘진짜 직업’이 아니었던 것 같다.
직업이란 돈을 벌어먹고 살 수 있어야 하니까.
틀린 답을 말하는 것을 멈춘 이후로는 수학문제집 같은 곳에 낙서를 하며 지냈다.
그 이후로도 정답을 맞춘 적은 별로 없었지만 학교에서 넋 놓고 있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시간들이 모두 창작의 시간이 되어주었다.
‘왜 어른들은 낙서를 하지 않을까?’ 어릴 때부터 항상 의문이었는데 내가 커가면서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나의 질문에 스스로 깨닫게 되었던 날은, 내가 수학문제집을 풀지 않아도 되는 나이가 되었을 때였고 나도 더 이상 낙서를 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즐거이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없어졌다는 것을 깨닫는 날은 조금 슬프기도 했다.
모두가 염려해주고 가르쳐 준 덕분에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게 되었으니까.
어른들은 낙서를 할 시간이 없었다.
일을 해야하고 사람들을 만나야하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녀야하기 때문에, 또는 언제나 어떤 것을 하고 있는 상태이길 권장받기 때문에 멍하니 낙서하는 시간이 존재할 수가 없다.
버스런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책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누구도 하루 4시간 이상 일하도록 강요받지 않는 세상에서는 과학적 호기심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호기심을 맘껏 탐닉할 수 있을 것이고,
어떤 수준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든 배곯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젊은 작가들은 기념비적인 대장을 내는 데 필요한 경제력을 확보할 요량으로 감각적인 작품을 써서 주의를 끌어보려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사실, 마침내 대작을 쓸수 있을 만한 상황이 되었을 때는 이미 취향과 재능이 달아나고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돈을 벌지 못하면 그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취향과 재능을 잃어버렸으며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을 잃은 것일까 생각해본다.
좋아하는 것을 맘껏 좋아하면서 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