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글

2021년 1월 1일, 낙태죄가 사라진 첫 번째 날

별 이상한 아이 2021. 1. 1. 23:45

 

올 해는 어떤 기념일들이 설레지 않아서 주변의 들뜬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무덤덤한 내 모습이 머쓱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생일, 크리스마스, 새해 인사 이런 것들.

2019년 4월 11일, ‘낙태죄’ 헌법 불합치 판결이 났고 2020년 12월 31일 ‘낙태죄’는 사라졌다.
‘낙태죄’가 없는 2021년을 맞이했다. 이 날을 위해서 두 번의 헌법소원, 집회를 열고, 기자회견을 하고, 찬 길 바닥에 드러누웠던 여성들.
무수히 많은 여성들의 노력으로 맞은 오늘은 기쁨의 환호를 해야함이 분명한데, 나는 울컥 눈물이 먼저 날 것 같았다.
여성과 의료인을 처벌하는 법조항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고통받아야 했는지, 고통이라는 단어 하나로 다 헤아려질 수 없는 여성 한 명 한 명의 삶을 생각하면 억울하고 화가나서 눈물이 날 것 같다.
아무런 정보도 제공되지 못하는 막막함, 안전하지 못한 의료환경, 의료비용 부담, 개인이 오롯이 감내해야하는 모든 것들. 열거하고 싶어도 열거할 수가 없다.
하나하나의 인생은 어떤 특정한 상황과 범주에 들어갈 수 없다. 글자로 담을 수 없다. ‘특별한 사유’를 두어 허용적, 조건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낙태죄’로 여성을 고소하려고 한 사람들은 모두 파트너인 배우자였다.

오늘 아침 눈을 뜨자마자 시몬베유의 ‘국가가 아닌 여성이 결정해야 합니다’를 모두 읽었다.
지금 시점에서는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표현들이 있었지만, 1974년의 연설문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프랑스는 1920년 임신중단과 피임 모두 불법이었다. 피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 조차 위법한 행위였다. 1943년 세탁소를 운영하며 여성의 임신중단을 도왔던 마리 루이즈 지로는 교수형을 당했다. 1971년 ‘343인 선언’을 통해 343명이 우리가 낙태한 위법한 사람이라며 낙태죄에 저항했다. 물론 국가에서는 형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하는 이 여성들 중 단 한명도 잡아들일 수 없었다. 1974년 당시 보건부 장관이었던 시몬 베유는 ‘국가가 아닌 여성이 결정해야 합니다’라는 연설과 함께 임신 중단 합법화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후로도 법개정을 통해 사회보장기금으로 수술비용이 보장되고, 임신중단약물인 미페프리스톤 허가, 질병보험 처리, 미성년자에게 사후피임약 처방과 임신중단 시 부모동반이 필수가 아니게 되었다. 나아가서 현재는 임신중단에 대한 정보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경우 임신중단 방해죄에 해당된다.


여성의 몸을 국가가 통제할 수 있다는 그 믿음, 그 신념은 너무나 견고해서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는 것이 어려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운 좋게 2019년에 국제세계여성쉼터 컨퍼런스에 참석할 수 있었는데, 그 중 한 세션에서 임신중단에 대한 유럽의 반향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임신중단이 합법화 된 이후에도 프로라이프, 종교집단 등 꾸준히 반대하는 세력이 있으며 그 중에는 과거로 돌아가는 법제화나 여론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호주에서 온 한 활동가는 호주 또한 임신중단이 합법화가 되었지만, 수술을 해 주는 병원이 대도시에만 있어서 중소도시에 사는 사람은 차로 몇 시간 씩이나 운전해서 가야한다고 말했다.
학교를 다니고 있거나 직장에서 며칠 간이나 임신중단을 위한 휴가를 낼 수 상황이라면 실질적인 접근이 불가능한 상황인 것이다.
수익성을 따져 의료시설이 갖춰지지 못하거나, 의사가 개인의 신념에 따라 의료행위를 거부하게 된다면 여성들은 다시 고립되고 만다.

언제든지 과거로 돌아가려는 세력은 있겠지만 ‘낙태죄’가 존재함으로서 선택을 달리해야했던, 선택권이 존재하지 않아 고통받았던 여성들의 삶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할 것이다.
국가의 정책방향이 그래서 중요하다.
현재 난임시술은 보건소에서 의료비 지원을 하고 있고, 근로기준법상 난임휴가를 두어 난임치료를 받는 경우 사업주가 휴가를 주는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난임시술이 가능한 병원 정보를 지자체 홈페이지에서 찾을 수 있다.
임신중단도 ‘시술’이 될 수 있다. 다를 게 무엇이며 달라야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정도 정책 의지를 갖고 지원을 해주어도 안전한 의료환경에 접근이 가능할 것 같다.
그리고 어떤 노력을 해도 더 취약한 여성에게 법과 정책은 더 멀리 있을 것이다. 그 간극을 줄이기 위해 국가에서 노력해야한다. 이제 여성이 아니라 국가가 나서서 해야할 일이다.

우리는, 나는 ‘낙태죄’가 없는 1월 1일을 맞이했다.
헌법소원을 하러 갈 일도, 집회에 가야하는 일도, 썅년이라고 욕을 먹어야 하는 일도(1974년 당시 343인 선언은 ‘343인의 썅년들’이라는 비아냥을 받았다),
다른 누군가의 일에 자신의 일처럼 눈물 흘리거나 분노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앉아서 관망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욕하거나 조롱하고 있을 때, 여성들은 연대하며 법과 세상을 바꾸고 있다.
시몬베유의 연설문의 일부를 인용하며 글을 마치고 싶다.

저는 미래를 두려워하는 류의 사람이 아닙니다. 젊은 세대들은 우리와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곤 합니다.
우리 역시 우리가 길러지던 방식과 다르게 그들을 길러냈습니다. 젊은 세대는 다른 세대와 같이 용감하고, 열정과 헌신을 다할 줄 압니다.
그들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를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부디 신뢰합시다.
-1974년 11월 26일 시몬 베유의 연설 “결정은 여성이 내려야 합니다” 중에서 -